Column by Pastor Konju (Peter) Kim

담임 목사 칼럼 및 설교문

제목설교전문_염려하지 말라_1편_마6: 25-342022-10-26 07:15
작성자 Level 10

연속 설교 1- 염려하지 말라  (마6: 25-34)/                                                  설교일:  2022년 10월 16일          설교자: 김곤주 목사

사람들은 누구나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살아가는 집 집의 렌트비나 융자때문에 걱정하며 살아갑니다. 부모는 자식이 속썩이면 커서 뭐가 될까 걱정합니다. 물론 자식이 다 커서 직장을 가지고 결혼을 해도 ‘잘 살아갈까’ 하고 자식 걱정을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속에서 실타래처럼 얽히고 섥힌 인간관계 때문에 걱정하고 고민하면서 살아갑니다. 나이가 들면 대부분은 자신의 건강이 가장 큰 걱정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마음처럼 몸은 안따라주고, 몸의 기능은 점점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걱정 없는 곳은  무덤뿐입니다 (“서로 인사?”). 그럼 예수님을 잘 믿고 믿음이 좋으면 걱정거리가 안생길까요? 걱정거리는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그 염려와 걱정거리를 어떻게 다루느냐 하는 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6장 25절에 나오는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에서 예수님이 말씀한 내용의 결론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앞에 나오는19-21절을 보시면,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1절).

그 다음 22-23절을 보면, 눈은 몸의 등불과 같다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22-23절).[1] 다시말해서, 우리 영혼의 눈이 건강하면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고 하늘에 보화를 쌓는 삶을 살아가지만, 우리 영혼의 눈이 어두우면 진정한  삶의  의미를 바로 보지 못하고 어두움 가운데 살아간다는 교훈을 주는 비유적인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 다음 6장 24절에 가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6:24). 이와같이 예수님은 19-24 절에서 재물에 대하여 먼저 언급한 다음에,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라’는 본문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우리의 근심과 걱정은 물질과 관계된 경우가 많습니다. 물질이 적어도 걱정이고, 많아도 걱정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럼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고 적당하면 좋겠죠? 그런데 어느정도가 적당한 기준 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살아온 환경이나 문화 혹은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에 따라서 각자 다를 것입니다.

한마디로, “적당한 기준이라는 객관적인 정답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살고 있는 형편에서 더 나은 조건을 찾고, 그것이 자신이 만족할 만한 적당한 조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적당하다’는 절대적인 기준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과 우리가 원하는 것들을 소유할수 있는 돈이 우리의 우상이 되기 쉽습니다.

잠언 30장 8-9절에서 아굴은, ’하나님 나로 너무 가난하게도 말고 너무 부하게도 말게 해달라는 기도의 내용이 나옵니다. 왜냐하면 너무 가난해서 범죄할까 두렵고 너무 부유해서 하나님을잊어 버리고 살까 두렵기 때문이라고 아굴은 고백합니다’ 그럼 너무 가난하지 않고 너무 부요하지 않는 적당한 기준이 어느 정도일까요?

그것도 자신이 살아온 환경과 문화에 따라 기준은 각자 달라집니다. 한마디로, 그 기준은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저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 사실 우리들은 부자들입니다. 그들이 소유하지 못한 것들을 많이 소유하고 누리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만족을 못할까요? 정작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내 인생에 있어서 하나님이 더 크게 보이느냐 아니면 물질이 더 크게 보이느냐 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본문 바로 앞에 있는 24절을 보면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6:24). 인간은 만족을 모르기 때문에 결국 물질이 우리 삶의 우상이 되기 쉽다는 경계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보다 물질에 더 집착하면서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또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의 유익보다 나의 물질적인 이익에 더 집착하면서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교훈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베푼만큼 인정받고 보상받기를 기대한다면 그것은 결코 선행이 아닙니다. 그것은 계산적인 생각으로 하는 비지니스적인 행동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은 하나님과 거래하는 비지니스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내가 10만원 바치면 하나님이 100만원 채워주실 것이라는 마음으로 바친다면 그것은 믿음이라기 보다는 욕심에 가깝습니다. 그런 마음과 행동은 보물을 하늘에 쌓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먹고 마시고 살아갈 재물이 부족해서 염려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6번이나 반복하면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헬라어 (Greek)로 ‘염려하다’라는 단어는 ‘메림나오’ (μεριμνάω) 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마음을 나누다’라는 어원에서 나온 말입니다. 염려하면 이럴까 저럴까 하고 마음이 나누어집니다.

마음이 나뉘어 지면 생각이 혼란스러워 지고, 마음이 한가지에 집중하기 쉽지 않지요. 그런데다가 염려와 걱정이 깊어지면 우리의 건강과 몸을 해치기도 합니다. 결국 지나친 염려는 우리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잠언서의 기자는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고 잠언 17장 2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쁨은 우리 마음의 보약이지만 근심은 우리 마음에 독약입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걱정스러운데 어떻게 기쁘게 살수 있을까요? 본문26절에서 예수님은 ‘공중의 새를 보라’고 말씀합니다.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십니다. 그걸 보면서 무얼 생각하라는 말일까요? 공중의 새들은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않아도 먹고 사니까 너희들고 일하지 말고 살아도 된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공중을 나는 새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필요한 먹이를 찾아 날아다닙니다. 새들도 자신과 자신의 새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부지런히 먹이를 찾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렇게 자연속에 살아가는 새들도 스스로의 노력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자연속에 마련해 둔 양식이 없으면 새들이 아무리 먹이를 찾아 다녀도 헛수고 일 뿐입니다.

들판의 백합화나 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학교에 다닐적에 국어책에 나온 <국화 옆에서> 라는 서정주 시인의 시를 읽지 않았습니까? 그 첫 두 소절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렇게 풀 한포기 꽃 한송이 자라는 과정속에도 생명의 몸부림이 있었다고 시인은 노랳고 있는 것입니다. 천둥과 비바람을 견디고 뜨거운 태양을 이겨내면서 땅속의 자양분을 빨아 들이는 인내의 시간들이 있어야 들풀도 꽃을 피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을 해보세요.

들에 피는 꽃 한송이가 땅의 영양분을 흡수하면서 스스로 자라는것 같지만, 그 땅속에 필요한 영양분을 만드시고 예비해 두신 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뿌리는 그 제공된 영양분을 빨아 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결국 모든 생명체가 살기 위해서 하는 그  수고는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것들을 취하는 보조적인 노력에 불과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나는 새들을 위해 근본적으로 필요한 먹이를 준비해 두셨고, 들에 피는 백합을 위해 땅의 영양분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고 하신 말씀을 통해서 무엇을 생각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자연의 창조주이시고, 그 분이 자연 만물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심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냐고 물으십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 내용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들을 보살펴 주시지 않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염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제이시 페니(J. C. Penney)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나중에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그렇지만 사업에 실패하고 많은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걱정과 근심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었고, 결국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찬송소리가 나서 찾아 갔는데, 작은 건물안에서 기도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뒤에가서 가만히 앉았습니다.

그때 페니가 자주 듣고 불렀던 찬송가가 흘러 나왔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라는 찬송가였습니다  그때 페나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후에 그는 그 당시에 경험했던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기를 “나는 무한히 어두운 공간에서 찬란한 태양 빛으로 옮겨지는 느낌이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때 마음속의 무거운 짐이 옮겨져서 그 방을 나올 때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차츰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용기를 내어 사업을 시작했고 나중에 그는 백화점 사업에 성공하여 미국의 백화점 왕이 되었습니다.인턴넷에서 보는 한글 위키백과에는 ‘페니 컴퍼니 주식회사 (J. C. Penney Company, Inc.)가 미국의 50개 주 가운데 하와이 주를 제외한 49개 주에 백화점을 운영하고 있고, 푸에르토리코에 865개의 백화점을 운영하고 있다’고 나옵니다. 다른 영문싸이트 자료를 찾아 보니까, 미국 50개 주에 1,100개의 상점들이 있다고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들이 잘 되어가면, 우리가 똑똑해서 혹은 우리의 노력이나 수고로 모든 것을 이룬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쉽게 오만해 지거나 자만해 지기도 합니다. 잘되고 성공한 사람들이 쉽게 교만해지고, 그래서 남을 무시하기 쉽습니다. 혼자 잘난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지켜 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것도 할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어버리고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 냈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될때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가고, 일이 잘 안풀릴때 걱정과 염려를 주님께 맡기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는 것이 믿음 생활입니다.

본문 27절을 보면 보면, 예수님게서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말씀합니다. 염려한다고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하는 물질에 대한 염려와 관계된 말씀이지만, 이 안에는 우리가 안고 있는 모든 종류의 염려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어느 미국 대학의 심리학팀이 조사한 결과, 사람들의 걱정거리 중 40%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30%는 과거에 이미 일어났던 일에 대한 걱정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진짜 걱정할 만한 일은 8% 밖에 되지 않았고, 그것도 정말 심각하게 걱정할 일은 아니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앞으로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미리 염려하면서 살아갑니다. 염려할 필요가 없는 일, 염려할 가치도 없는 일에 염려하면서 마음과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염려와 근심이 지속되면 삶의 의욕과 기쁨을 잃게 됩니다.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갖게 합니다.

심지어는 두통, 소화장애, 불면증과 같이  몸에 이상을 가져 오거나 심각한 질병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렇게 구지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들, 아니 염려할 가치가 없는 일들을 붙잡고 염려하느라 얼마나 시간과 에너지와 건강에 손해를 보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 신자들에게 있어서 염려는 믿음과 관계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본문 28-30절의 말씀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본문의 말씀을 보면, 염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부족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들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라면,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에 핀 백합화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래서6장 30절 마지막에 가면,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무엇때문에 걱정하고 염려하고 계십니까? 재물이 부족해서 염려하십니까 자녀들 때문에 염려하십니까? 인관관계 때문에 염려하십니까, 사업 때문에 염려하십니까? 사도 베드로는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Cast all your anxiety on him because he cares for you)고 말씀했습니다.

너희가 염려를 주님께 맡기면 주님께서 너희를 돌보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말씀했습니다 (빌 4:6)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을 아시고  돌보시는 분이십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염려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임을 늘 확인하면서 주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문제를 바라보고 문제만 생각하지말고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염려를 묵상하는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럴때 염려속에서도  평안이 있고 기쁨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1]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마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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